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문단 편집) ==== 실패한 자식농사? ==== 고모 파우스티나의 딸로 고종사촌관계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막내딸 소 파우스티나와 결혼해, 30년간 14명의 자녀를 낳았다. 이중 남녀 이란성 쌍둥이, 남자 일란성 쌍둥이가 각각 있었는데, 자녀 중 그보다 오래 생존한 이는 딸 4명과 아들 1명이었으며 딸 1명과 아들 1명은 쌍둥이 중 각각 생존한 [[루킬라]]와 [[콤모두스]]다. 첫째 도미티아 파우스티나는 147년생으로 스물여섯의 나이에 처음 얻은 아이인데, 151년 요절했고 장남 티투스 아일리우스 안토니누스는 149년에 태어났지만 이해 죽었다. 이후 남녀쌍둥이가 태어났는데 차남 티투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는 영아기에 요절, 그 쌍둥이 여동생은 성인 이후에도 생존했다. 이 아이가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실상 장녀 [[루킬라]]다. 이후 차녀 파딜라, 삼녀 안니아 갈레이아 파우스티나가 태어났는데 이들은 모두 생존했고 각각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조카인 로마 귀족 출신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그리스 혈통의 옛 클라우디우스 가문 클리엔테스 후손으로 갈라티아 출신인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와 결혼했다. 두 사위는 마르쿠스 황제 부부가 상당히 아낀 이들로 인품이 대단했지만, 풀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명령으로 자결을 선고받고 죽었고[* 장인의 유지 때문에 콤모두스가 망가진 상황에서도 아내 파딜라와 함께 끝까지 콤모두스 갱생을 위해 노력하고, 원로원을 설득해 국가를 돌아가게 했다. 그러다가 폼페이아누스가 고령을 이유로 은퇴해버리고, 콤모두스가 암살됐다고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끝까지 로마를 생각해 자기 욕심을 내지 않아 큰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믿었던 페르티낙스가 피살되고 근위대가 돈으로 제위를 팔고, 세베루스가 로마로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는 등 국가가 막장으로 치닫는 것이 1년 사이에 모두 터지자, 완전히 의욕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따라서 사실상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시골로 은거하는데, 권력을 쥔 세베루스는 그가 로마진군을 가리켜 "설령 선의로 했다고 해도, 국가를 생각하면 국법상 잘못된 일을 한거다"라고 한 발언을 꼬투리잡아 그에게 자결을 명했다고 한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는 그 조부와 부친처럼 뛰어난 스토아 철학자임에도, 정치쪽과는 거의 담 쌓은 인사인 척 하면서 제 잇속만 챙긴 까닭에 콤모두스가 망가진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해가 갈까 두려워 비겁하게 수수방관했다고 비난받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 철학적 재능을 무척 아꼈던 사위라서, 함께 스토아 철학과 관련해 토론도 벌이고 후원도 해줬다. 따라서 마르쿠스 황제는 그에게도 살아생전 콤모두스 미래를 부탁했는데, 그는 폼페이아누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달리 보좌 및 고문역할을 사실상 회피했다고 한다.] 콤모두스 위로는 넷째딸 [[코르니피키아]]를 뒀는데, 그녀는 푸닉 출신의 원로원 의원이자 집정관 [[마르쿠스 페트로니우스 수라 마메르티누스]]와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는 아들을 한명 있었는데, 사이가 대단히 나빴다. 그렇지만 마메르티누스는 콤모두스와 친구였고, 집정관까지 올랐다. 허나 그는 루킬라가 주도한 콤모두스 콜로세움 암살미수사건에 가담해 신임을 잃었고, 아내와는 별거했다가 192년경 콤모두스 암살 미수를 기획했던 것이 밝혀져 처형됐다. 다행히 코르니피키아는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고, 182년 이후부터는 별거한 터라 큰 문제가 없었다. 따라서 코르니피키아는 190~192년 사이 로마귀족 루키우스 디디우스 마리누스와 재혼했고, 사이에서 또 다른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코르니피키아는 212년 카라칼라에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살해됐다. 14명 자녀 중 막내는 딸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인데, 그녀는 여러 자녀 중 로마 혹은 이탈리아가 아닌 [[판노니아]] 병영에서 태어나 자랐다. 비비아는 푸닉 출신의 명문 귀족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부루스의 후처로 낙점돼 결혼했고, 일찍부터 아프리카 속주와 로마를 오가며 생활했다. 헌데 그녀의 남편인 마르쿠스 황제의 막내 사위 안티스티우스 부루스는 181년 콤모두스의 호의로 집정관이 됐음에도, 콤모두스가 루킬라가 벌인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힘들어함을 이용해 188년 제위를 노리고 암살을 계획했다. 이는 실제 결행 전에 발각됐고, 그는 188년 붙잡혀 처형됐다. 그리고 이 사건의 여파로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는 오빠 콤모두스에게 괴씸죄로 시댁이 있는 북아프리카에서만 한동안 살도록 조치가 취해져, 티빌리스에서 머물게 됐다. 이후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는 아버지의 해방노예 출신 그리스인 아가클리투스의 아들로 세금징수원, 근위대 장교를 거쳐 원로원 의원까지 오르게 될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아가클리투스와 결혼했고, 콤모두스는 그녀의 재혼 이후 여동생에 대한 처벌을 해제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옛 시댁인 아프리카 속주를 오가며 생활했으며, 대부분의 삶은 이탈리아보다는 오늘날 알제리 북부의 도시 티빌리스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때 그녀는 자신이 힘든 시절 머문 북아프리카 일대에 막대한 돈을 후원했다고 한다. 성인 이후에도 생존한 5남매 중 파딜라와 안니아 갈레이아 파우스티나 외의 아이들과, 사위들, 외손주들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았다. 하여 당대부터 실패한 자식농사의 대명사로 대차게 까였다. 물론 끝까지 황궁에 남아 동생 콤모두스를 돌보고, 막장정치를 조장한 [[클레안데르]]를 견제한 파딜라[* 동생 콤모두스에게 여러 번에 걸쳐 "지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레안데르를 너무 키워주는 것 아니냐"며 장차 그가 큰 문제가 될 것을 경고했다고 한다.]와 그 남편 퀸틸루스, 루킬라의 남편으로 제정 시대 충신으로 유명한 폼페이아누스는 그 평가가 좋았고, 사위들 중 신분이 좋지 않아 까인 막내딸의 두번째 남편 아우렐리우스 아가클리투스에 대한 비판은 이 사람의 인격이나 소양 문제가 아니라서 이를 감안해야 한다. 장녀 루킬라, 사실상 외아들 콤모두스는 워낙 유명해 공개석상에서도 까였고, 이들의 잘못된 행적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부부와 이들의 숙부이자 루킬라의 첫 남편 루키우스 베루스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는 사녀 코르니피키아와 막내딸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 역시 마찬가지라서, 당대 로마인들에게 이 부분은 마르쿠스의 자식농사가 실패한 이유로 계속 거론됐다. 다만, 마르쿠스의 자녀 중 코르니피키아,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는 인격적으로 거만하고 권력욕이 심한 루킬라, 재위 2년만에 루킬라의 음모로 완전히 정신건강이 피폐해져 막장암군이 된 콤모두스와 달리 큰 비난을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귀족 사회 기준으로도 심각히 문제 있지 않고, 그들 생활 수준으로는 지극히 평범하게 사치스러웠기 때문이다. 허나 이들의 행동은 분명 사생활 부분에서 문제가 있거나, 두 번의 결혼으로 맞이한 남편들 때문에 모든 부분이 완벽하다고 찬사 받은 아버지와 비교돼 비난받는 이유가 됐다. 사녀 코르니피키아는 [[카라칼라]]에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자살방식으로 살해돼, 순교자 이미지가 있으나 남자편력이 있었고 여러 애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중 가장 유명하고 오랫동안 연인 사이였던 유명인사가 바로 [[페르티낙스]]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불륜관계를 맺었던 사이였고, 그 관계가 페르티낙스가 피살될때까지 지속됐다. 막내 비비아는 로마 황녀 중 [[귀천상혼]]을 하면서도, 두번째 남편으로 아버지의 옛 해방노예 아들을 직접 선정한 다음 맞이해 이 부분에서 "부모의 명성과 가문의 지위에 먹칠을 한다"고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그녀의 시아버지가 되는, 아가클리투스와 시어머니 푼디니아의 결혼 스토리, 그리고 남편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아가클리투스의 출생 배경이 상당한 몫이 된 듯 하다. 공주의 시아버지가 되는, 아가클리투스의 결혼은 로마사회에서 매우 희귀한 '해방노예와 남편과 사별한 귀부인과의 결혼'. 그것도 현역 황제 형제의 친구이자 능력 있는 젊은 그리스 해방노예가 방계황족 안니우스 리보의 미망인 푼디니아의 새남편으로 결혼한 케이스라서, "부모와 가문에게 먹칠을 했다"고 손가락질 받은 것은 당시 기준으로 비난사유가 충분했다고 평가받는다. 고대기록에 따르면, 아가클리투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와 친구였고 그들의 삶과 제위 등극에 좋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음에도 푼디니아와의 결혼은 환영받지 못했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그 동생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는 아가클리투스가 자신들의 젊고 유능한 그리스인 해방노예이며 안토니누스 가문의 믿을만한 가신이라고 해도, 로마 역사상 거의 없는 결혼이라서 강하게 불만을 드러냈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예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두 황제와 황실의 우려대로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 온갖 구린 소문이 끊임없이 터져나와 황실을 곤욕스럽게 만들었다고 한다[* 소문 수준이 단순히 "주인집 젊은 마님과 젊은 해방노예의 결혼이 안니우스 리보가 죽기 전부터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수준이 아니라, "마르쿠스 황제의 아내 소 파우스티나가 뚜쟁이 역할을 했다", "소 파우스티나가 자신의 젊은 애인을 미망인이 된 사촌 처제에게 보냈다", "두 황제가 홀로 된 사촌처제에게 자기 해방노예를 소개했다"는 둥의 막장스토리 완결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르쿠스 황제 형제와 소 파우스티나가 손가락질 받는 상황까지 연출됐다고. 이런 이유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는 이 소문이 나오자, 이례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이런 거짓말은 그만해라"고 강력하게 맞대응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는 이후에도 회자됐는데,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가 이 결혼에서 태어난 아가클리투스와 푼디니아의 아들과 결혼했으니 이후 상황은 어땠는지 충분히 짐작갈 것이다. 하지만 공주의 남편이 된 아우렐리우스 아가클리투스는 어머니 푼디니아를 통해 원로원 귀족 가문의 후손이며, 실제 계급도 "로마시민권자+ 상류층 기사계급 자제"라서 엄밀히 말하면 또 귀천상혼까진 아니었던 모양. 더군다나 이런 비난에도 아우렐리우스 아가클리투스는 이런 스토리 외에는 큰 비난거리 없는 인물이고 구린 구석 없는 멀쩡한 사람이라서, 더 이상 나쁜 소문은 없었고 이들의 결혼 생활이나 후손들의 삶도 평탄했다고 한다[* 오히려 마르쿠스 막내딸 입장에선 더 좋은 결혼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왜냐하면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의 첫 남편은 그저 권력을 잡기 위해, 루킬라와 공모해 반역죄로 처형됐고 정략혼의 목적에서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어떤 면에선 이 결혼이 황실의 분란과 암투을 차단하는 면에선 나았다는 주장.].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외손주로는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의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 루킬라와 폼페이아누스의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파딜라와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의 아들 퀸틸루스와 딸 플라우티아 세르빌리아 등이 있다. 이들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끝난 이후에도 모두 원로원 의원 내지 귀부인으로 살았는데, 그들의 평판도 평균 정도이거나,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부모 모두를 통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훌륭한 혈통을 타고 났다고 평가받은 파딜라와 퀸틸루스의 자녀는 일찍부터 부모를 따라 상당히 조용한 삶을 살면서, 일정부분 중앙정계와 거리를 둔 처세술로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화를 면했다. 하여 두 외사촌과 달리 크게 잘 나가거나, 못 나가는 일도 없었다. 반면 세베루스 프로쿨루스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는 그 능력이 지나치게 무능력하거나 평범해, 관심을 못 받거나, "휼륭한 혈통 외엔 돋보이는 것은 없었다."는 굴욕적인 평을 받았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외삼촌 콤모두스 사후 차기황제로 거론되지 못하는 굴욕을 겪었다고 한다. 루킬라의 아들로, 제정 시대의 명장 중 한명이자 인성이 뛰어난 아버지 폼페이아누스를 둔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는 "위대한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평과 "휼륭한 혈통 외엔 돋보이는 것은 없었다."는 평을 동시에 들었다. 그는 [[카라칼라]]에게 누명을 쓰고 처형됐지만, 성품은 성실했고 본인과 두 아들 모두 로마인, 이탈리아인, 안토니누스 가문의 적통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해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고 평가받았다. 그렇지만 그 능력은 평범했고, 혈통에 따른 후광 외엔 앞세울 공적이 부족했다. 그래서 능력이 평범했음에도 무능하다고 비난받진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211년 말, 212년 초 그를 죽인 카라칼라는 큰 비난을 받을 것을 두려워 하면서, "도적들에게 살해됐다."는 식으로 얼버부리면서 책임을 회피했다고 한다. 하지만 마르쿠스 황제의 외손자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는 지나치게 평범했던 루키우스 폼페이아누스와 달리, 여러 외손자 중 정계활동을 가장 열심히 했어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는 스토아 철학에 심취해 정치와 담을 쌓은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와 달리, 본인 안위만 생각한데다 지극히 무능했다고 한다. 외사촌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는 평범했어도, 이탈리아 귀족이라는 인식과 외조부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고자 스스로 군복무를 하면서 주변에게 악평을 듣지 않았는데, 이 사람은 매우 귀족적이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외손자라는 자랑에도 그리스인이라는 자부심이 더 강했다고 평가받았다. 따라서 외삼촌 콤모두스가 멀쩡할 때부터 외삼촌과 원로원 인사들에게 일찌감치 "무능하고 존재감도 없다"고 결론났다고 하며, 이후에도 콤모두스와 원로원에게 똑같은 평가를 받아 제 능력을 뽐내진 못했다. 이는 외사촌 루키우스 폼페이아누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는 다른 평이었고, 콤모두스는 막장이 된 상황에서도 제 조카가 무능하다는 이유로 대놓고 무시했다. 그래서 콤모두스가 암살된 직후, 다른 사촌들과 달리 안토니누스 일가 남자황족 중 유일하게 투명인간처럼 거의 무시받았다[* 원로원에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맏사위 폼페이아누스나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조카로 본래부터 가문이 좋았던 파딜라의 남편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를 차기 황제로 고려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과 아이들 모두 제위에 생각이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 그럼에도 어쨌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외손자인 까닭에 당대 명문가와 두루 인척관계를 맺는 기회를 얻어, 당대 원로원 유력귀족인 폼페이우스 가문, 비리우스 가문 등과 통혼했다고 한다. 이 결과, 이 사람의 후손들은 4, 5세기까지 승승장구했고, [[세베루스 왕조]]의 미치광이 황제 [[엘라가발루스]]는 자신의 부인 중 한명으로 이 사람의 손녀 [[안니아 파우스티나]]를 잠깐동안 아우구스타로 맞이했다고 한다. 다행히 안니아 파우스티나는 엘라가발루스가 암살될 때, 버림받지 않고 살아남았는데, 그녀의 아들은 3세기 군인 황제 시대동안 활약한 온건하고 양심적인 원로원 의원 폼포니우스 바수스이고 사위는 3세기 군인 황제 시대 내내 더 큰 내란을 막은 고결한 로마 원로원 의원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